미술 비평가, 교수 마리오 나베즈
모든 색은 잠재력과 단점을 갖고 있다. 세계 곳곳을 누비고 나면 어떠한 색에는 때때로 모순되는 여러가지 다양성이 부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예술가가 어떠한 색에 완전한 의도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이다. 빨간색은 내가 지구 위 어디에 발을 디뎠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상징성을 가진다. 보라색 역시 머리를 지끈하게 할 함축적 의미들을 내포할 수 있다. 색상환 속의 어느 색이나 해당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색상환 안에는 검정이나 그 반대인 흰색이 없다. 물리학에 꽤 친숙한 사람이라면 가시광선 스펙트럼 안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흑과 백은 아예 ‘색'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화가들은 팔레트 위에 명암 조절을 돕기 위해 고고히 자리잡고-차지하고-이목을 이끄는 검정과 흰색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들이 이 색들의 미적 효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검정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검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반면에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모든 색깔의 여왕'이라 불렀으며, 앙리 마티스는 검정의 힘을 음악에 비유했다.
검정은 피정원의 그림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등장하면서도, 눈을 돌릴 수 없는 존재감을 지녔다. 물론 작가의 작품 속엔 캔버스 위 ‘찬란한 금덩어리’들 그 위로 흐르는 녹슨 진갈색의 흔적처럼 다른 색들도 등장한다. 하지만 검정은 피정원의 화면을 지배하는, 작가가 결코 가볍게 여기는 색조가 아니다.
캔버스 위에서 수행된 일련의 연구작 은 표면과 색의 변조에 대해 질감과 점성을 가지고 실험한 피정원의 벅찰 만큼 긴 ‘재고목록’이다. 노트, 흔적, 얼룩과 같은 에피메라(ephemera, 잠깐 쓰이다 버려지는 것들의 모음-옮긴이)가 축적된 그의 스케치북은 작가가 자신의 재료와 검정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는지에 대해 부연해 설명한다.
그래서 작가가 그의 최신작에 라는 부제를 붙인 것은 놀랍지 않다. 이 부제는 벌써 100개의 수가 넘는 그의 회화 연작의 일부다. 무엇이 피정원에게 이런 집념을 갖고 하나의 예술적 요소를 탐구하도록 자극한 것일까?
전통은 그 흔적을 남긴다. 대한민국 서울시에서 나고 자란 피정원에게 ‘지필묵’은 필연적으로 문화적 DNA의 일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필묵’은 종이(지), 붓(필), 먹(묵)을 아울러 이르는 표현으로서, 한국적인 감성을 담고 있다. 피정원은 한국 문화에서 검정이 갖는 상징성–죽음과 존엄성, 권위와 지배력–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더 실제적인 문제와 결합하는 재기를 보여준다. 작가가 검은색 제소를 발견한 장소인 프랫 인스티튜드가 위치한, 웬만한 투지와 용기 없이는 적응하기 쉽지 않은 브루클린의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그가 뉴욕에서 보낸 시간을 ‘먹'과 연결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니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피정원의 그림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그중 하나를 골라서 살펴보자면, <Untitled; The Black Path CXVII>(2022)는 세로 90.9cm에 가로 72.7cm의 작품으로, 크기는 보통이지만 형태는 대략 인간 몸의 형태와 일치한다. 이러한 표상적 요소는 그림의 "초상화"적 성향에 의해 강조되며, 방향성은 어느 정도 본질적으로 대립적인 성향을 띈다. 구도적으로는 중심선에서 살짝 위로부터 상·하단으로 수평 이등분되어 있으며, 이를 기준으로 상단부는 벨벳처럼 부드럽고 투과성 있는 무광택 검은색, 하단부는 금속 주조를 띠는 흰색, 회색, 검은색의 아크릴 물감의 줄기들이 마치 폭포처럼 쏟아 흘러내리고 있다.
마치 교섭의 여지가 없는 듯 작가가 병치시켜놓은 매체와 제작방식을 통해 간결하게 고안된 화상(畫像)을 보고 있으니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있다고 한들 이 이미지의 본질은 정확히 무엇일까?
피정원은 오랫동안 추상적 표현주의에 대한 ‘빚’을 인정해 왔다. 구도와 색의 일종의 우위를 가리는 접근은 마크 로스코의 방식과 유사하다. 작품의 냉엄하고 간단명료한 물질성 역시 미니멀리즘의 영향으로 보인다. 작가는 전자의 전형적인 심리적 내면성과 후자의 극도의 구체성을 계승하면서도, 그 범위의 한도에서 벗어난 오늘날의 흐름을 화면 내에 구체화한다. 스스로 설정한 위압적인 압박에도 불구하고 피정원은 광범위한 은유의 힘을 이용한다.
피정원이 구현한 화면 속의 질감은 창작자에게 ‘감촉’과 ‘장소'가 얼마나 쉽게 사라지지 않는가에 대한 변증이다. 그들이 오래된 것처럼 보이든, 번들거리든, 금이 가든, 딱지가 있든 간에, 작가의 작품 위 표면은 자연 세계뿐만 아니라 육체의 감각을 상기시키는 실감적으로 전달한다. 이 표면은 마치 무심한 중력에 못 이겨 떨어지는 돌처럼 깨져버리기 쉬운 화면과 같다. 피정원이 교대로 쌓아올린 겹겹의 층은 부가적이고 파괴적이며, 목적에 대한 공언(公言)을 속삭임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관람객이 작가가 도심에서 자라온 환경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작품 속의 척박한 풍경에서 느껴지는 도시적 특성을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딘가 단조롭지만, 항상 우아한 피정원의 검정은 철학적인 측면에서 다소 음침하게 읽힌다. 그의 작업 노트는 실존적 접선, 엄중한 몽상, 그리고 그림이 "개인의 주관적인 의식을 촉진하는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다"라는 끈질긴 주장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사상은 그의 작품이 가진 강렬한 물질성에도 불구하고 관객들 경험의 본질과 가치에 관한 질문에 직면할 수 있는 통로–거울–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책임이 막중하지만, 그가 안내하는 길은 관대하기도 하다. 모든 작가가 관람객을 존중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을 존중하는 피정원의 작품 속 진실함은 귀중하고 희귀하고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