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한국 추상미술에서 새로운 한국 추상미술로

: 이춘환의 빛-결 시리즈

국립창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구지훈 

 

Ⅰ. 들어가는 말


서양미술의 흐름을 통사적으로 살펴보게 되면 주목할 만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났던 각 시기의 기저에는 서양미술사를 유지해 온 본질이나 다름없는 이항대립(二項對立)이 존재해왔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것은 선과 색채의 문제였다. 이성적이고 본질적이며 변하지 않는 선과 뎃생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쪽과, 빛을 중심으로 하여 감성적이고 개인적이며 가변적인 색채의 속성을 높이 평가하는 쪽의 대립이 그것이 설령 자의적이든 아니든 서양미술사의 전개에 있어서 주요한 동력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프랑스의 미술사학자 앙리 포시용(Henri Focillon)은 이러한 선과 색채의 대립이 이제는 “정신/물질, 물질/형태라는 낡은 이율배반”1)이라고 지적하면서 “형태와 배경이라는 고대의 이원론만큼이나 위력을 떨치며 아직도 우리 곁을 맴돌고 있”2)는 미술의 본질에 대한 이러한 이분법적 관점에서 자유로워질 것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아직도 의미나 편리함의 그림자가 조금 남아 있”3)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미술사 서술, 혹은 미술비평이 최소한 이러한 이항대립의 흐름, 그리고그 흐름 속에서 주목할 만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나는 시점과 그 이유에 대한 내용을 기본으로 한 상태에서 쓰여져 온 것이 이러한 편리함 때문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는 시간적 간격은 미술사의 타임라인(Time-Line)상에서는 점점 좁혀져 갔고, 마침내 ‘추상 미술(Abstract Art)’의 등장은 인류와 미술이 존재한 이래로 가장 큰 예술적 패러다임의 변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혹자는 “서양미술사에서 20세기 미술과 이전 미술을 경계 짓는 분수령은 바로 추상미술의 출현”4)이라고 할 정도의 변환이었다. 그리고 추상미술이라는 미술사상 가장 큰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직전부터 이미 대전환의 시대를 위한 꿈틀거림도 분명히 존재했다. 낭만주의 시대의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에서 시작된 이러한 꿈틀거림이 ‘최초의 모더니스트 화가’5) 마네(Edouard Manet) 를 거쳐 ‘최초의 추상화’6)가 등장하는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는 백년도 걸리지 않았으며, 현대미술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문장인 “회화는 전쟁터의 말이나 누드, 또는 어떤 에피소드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어떤 질서에 따라 배열된 색채로 뒤덮인 평면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가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에 의해 언급된 것 역시 1890년에 불과했다. 앞서 언급한 ‘최초의 추상화’를 힐마 클린트의 것으로 설정한다고 하면 모리스 드니의 저 유명한 발언과 최초의 추상 간의 시간 간격은 고작(?) 25년에 불과하다. 요컨대, 추상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과 화폭의 물질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였으며 결과론적으로는 이 두 개념의 화학적 결합은 어마어마한 예술적 분화를 불러 일으킨 셈이 됐다.


회화의 물질성과 추상의 화학적 결합은 그만큼 강한 파괴력을 지닌 변화였다. 이는 국내의 화단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현상이었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초기의 많은 한국의 근현대 서양화가들도 꾸준히 이 문제에 대해 천착하고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으며, 여기에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던 동양화가, 한국화가들도 가세하면서 국내의 ‘회화’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이 예술적 전환기를 겪어내면서 꾸준히 다채로운 시도를 거듭하고 있는 이춘환(李春煥)의 작품세계는 대단히 풍성하여 주목할 만하며, 그 중에서도 <빛&결(Light-Grain)> 연작은 서설에서 언급한 물질적, 추상적으로의 대담한 변화를 시도한다.


Ⅱ. 마티에르와 물성회화, 그리고 한국적 추상의 위대한 시도


화폭이나 표면의 물질성이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물성회화는 크게 세 가지 층위에서 단계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물성회화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행위중심’, ‘물성중심’, 마지막으로 ‘행위와 물성의 합일점 중심’의 단계로 설명가능하다.7) 그 중에서도 물질 중심의 방법론은 물질간의 동질화 혹은 물질과 표면의 융합을 통해 물아일체의단계에 이르는 방법으로, 물질 자체의 개성을 통해 자아를 드러내고 물질과 자아 간의 만남을목적으로 한다. 즉 물질을 매개체로 관념적인 세계나 비물질적인 체험으로 이끄는 것이다.8)


환영(幻影)이 사라진 모더니즘 시대 이후로 회화를 가장 회화스럽게 만드는 대표적인 속성이 평면성임은 그린버그에 의해 강조되었고 그 평면성을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물질성이었다.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그린버그 본인 스스로도 자신이 정의한 회화의 평면성에 대한 논의가 물성회화와 모노크롬, 나아가 회화의 단순한 질료로서가 아니라 회화의 본질적 속성으로서의 마티에르까지 폭발적으로 확장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는 못 했으리라.9) “형태가 물질(la matière) 속에 살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정신의 한 관점, 기하학적 명료함으로 축소된 면적에 관한 하나의 사변에 불과할 것”10)이라는 포시용의 단언이 보다 더 물질의 가치와 의미를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듯 하다. 파울 클레 역시도 “재료라는 물질적 세계와 심리적 세계가 조화를 이루는 진정한 창조의 기반에 그 자신이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가 있다는 신념”11) 하에 작품 활동을 계속할 힘을 얻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재료, 혹은 물질이라는 속성은 그 자체로 질료이기 때문에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접근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20세기를 맞이한 이후의 서구의 물질론자들과 추상작가들의 이러한 물질성과 질료에 대한 찬양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전통적인 견해에서 볼 때, 형태로부터 그 형태에 선행하는 마티에르(Matiere)의 회귀는 일종의 퇴행을 의미12)한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크게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앞서 전제한 대로 ‘서구의 전통적인’ 견해에서, ‘일종의’ 의견일 뿐이다. 한국의 추상예술가들, 아니 태초부터 한국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시도해왔던 이들에게는 언제나 짙고 뿌연 운무 속에 어렴풋이 보이는 산봉우리같은 불변의 예술적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국적’ 서양화에 대한 표현과 해석, 그리고 도전이었다. 물론 박소현의 지적대로 추상미술은 “세계적 보편언어의 유토피아니즘”13)을 지향했었기에 “추상미술 앞에 ‘한국적’이라는 형용사를 덧붙이는 것은 분명 이율배반이자 논리적 형용 모순”14)으로 여겨질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계적 보편언어 역시도 “필연적으로 복수의 지방어를 산출하는데, 이 지방어는적극적인 차별화를 통해 창출되는 독창성(Originality)으로 스스로의 정당성을 획득”15)하기 때문에 ‘한국적’ 추상이라는 개념 역시도 “국가 또는 민족이라는 집단적 정체성과 결합”16)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첫 번째로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과연 ‘한국적 추상미술’의 대표적인 특징은 어떤 것이란 말인가?


오광수는 이에 대해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한국적 추상미술은 “결론적으로 우리의 추상은 [...] 직관적, 정서적 토로의 형식으로서의 추상”17)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추상이 이렇게 서정적인 경향을 지배적으로 띄는 것은 “근본적으로 [...] 예술을 자연과의 합일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18)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이춘환의 <빛&결> 연작 역시도 출발점 및 속성은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 밝힌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이 연작의 시초를 1989년, 고향인 전남 완도군에서 직접 느낀 총체적 감각의 경험에 두고 있다. 고향인 완도의 정도리 구계등은 자갈 해변이라 파도가 치면 돌이 구르는 소리가 들리게 되는데, 여기서 이 돌 구르는 소리와 함께 돌에 반사되는 달빛과 눈부심에서 영감을 얻어 <빛&결> 연작을 창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광수의 표현대로 대단히 ‘정서적이며 직관적’인 한국적 추상의 전범(典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남프랑스의 니스 해변도 자갈로 뒤덮인 해변이지만 ‘한국인’의 정서를 지니고 있는 이춘환의 감각에는 완도 구계등의 돌 구르는 소리와 반사된 빛이 함께 보여주는 공감각적(共感覺的)이고 환상적인 이미지가 더욱 더 서정적으로 가까이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이춘환의 추상, 그리고 한국적 추상에서는 작가 본인이 느꼈을 감정의 세기를 정량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은 바로 마티에르의 농담(濃淡), 그리고 그 표면층에 한없이 가늘고 얇게 쌓아올린 굴곡의 정도인 셈이다. 실제 육안으로는 상당히 신경쓰고 들여다 보아야만 인식할 수 있을 것 같은 이러한 물질의 층을 쌓아올리기 위해 작가는 캔버스를 바닥에 눕혀 놓고 물감을 떨어뜨려 맺히게 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이것은 기존의 회화 작업에서는 물감이나 종이 같은 재료가 단순히 형상(구상이든 추상이든)을 그려내는 매체(표현재료)로 사용되었지만, 단색조회화에서는 표현재료의 물성(物性)이 적극적으로 화면에 드러나19)기 때문이다. 수백, 수천의 물감의 층이 겹겹이 쌓여 탄생한 이 <빛&결>은 다양한 색깔이 서로 만나지만 충돌하지 않고 서로 양보하는 중용의 정신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방법론은실제로 한국적 정서의 추상적 표현을 고민했던 당시의 여러 작가들의 작품 제작 방식에서도 유사한 실례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당시 한국의 시대상과 불안한 정서, 감정들을 ‘한국적 앵포르멜’로 구현하며 포효하던 박서보를 비롯해, 우리 문화와 역사만이 가지고 있는 재료인 ‘한지’의 정제되지 않는 물질성을 담아내는데 천착했던 정창섭, 그리고 그러한 정창섭의 제자로서 <사조(思潮)>연작과 <만다라>연작 등을 잇다라 선보이며 미전(美展) 국무총리상에 빛나는 권훈칠 같은 작가들이야말로 한국적 추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가장 한국적 정서를 잘 드러낼 수 있는 마티에르가 무엇일까 고민했던 이들일 것이다. 이들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통해 구현했던 반복되는 덧칠과 행위(선긋기)는 바탕의 물질(물감)과 일체화(몰아합일)를 이루게 되고 이로 인해 물감의 물질적인 속성이 탈각하게 되면서 색이 비물질적인 빛으로 환원20)되는 성과를 이루어내면서 서구의 색면추상이나 색채 위주의 모노크로미즘과는 완벽하게 결이 다른 우리네만의 추상과 표면에 대한 탐구는 한층 진보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물성회화는 앵포르멜 이후 단색회화 또는 모노크롬이 전개되는 양상 속에서 포착될 수 있는데, 여기서 발견되는 한국미술의 물성과 행위,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상호작용은 서구 미니멀리즘과 다른 한국 미술 특유의 미감을 보여준다.21) 이춘환의 첫 번째 추상인 <빛&결>은 한지와 수묵이라는 전통적 소재와 방식을 충분히 활용하여 앵포르멜, 그리고 단색조의 마티에르에 대한 논의를 풀어나가고자 했던 위대한 한국적 시도라 할 것이다. 나아가 21세기에 들어선 이후로는 20세기에 작가 본인이 가졌던 마티에르와 단색조에 대한 생각들을 보다 더 원론적으로 풀어낸 새로운 <빛&결> 연작들을 내어놓고 있다.


Ⅲ. 서정 이춘환의 ‘빛-결(Light-Grain)’ 연작이 갖는 독자적인 가치


미술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자신 본연의 심미적 기능 이외에도 실로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미술은 실제적이고 부차적인 기능을 모두 벗어버리고 미술 자체만의 순수하고 고유한 영역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이해되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기능과 함께 공존해 왔으며, 또한 20세기 미술의 움직임 속에서도 변함없이 지속되어 오는 기능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명상을 유도하거나 정서의 울림을 통해 현실에 지친 우리를 위로하거나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기능이다.22) 몇십, 몇 백번을 찍어발랐을지 모를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깊숙이 침잠하는 색채로 뒤덮인 작품 앞에서 색면추상이 어떻고 미국의 추상표현주의가 어떻고 떠드는 것보다 말없이 조용히 작품을 매개로 작가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며 눈물을 흘리는 감상자가 더 의미있고 소중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이춘환의 본격적인 추상 연작인 <빛&결>은 그의 다른 어떤 시리즈들보다도 더더욱 이러한 미술의 순기능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다. 칸딘스키도 밝혔듯이 추상에 있어서 색과 형은 “우리의 마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한 수단”이며 “내심의 격동과 영혼의 외침을 화면에 털어놓”게 되고 “이 단적인 표출에 감정이입할 경우 사람들을 감동”23)시키는 작품이 되는데, 이춘환의 추상화는 정확하게 이러한 골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춘환은 스스로 도달하고 싶은 궁극적인 작품 세계로, 동·서양 가릴 것 없이 전 세계인이 공감하는 그림, 그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마치 음악을 듣는 것처럼 즐길 수 있는 그림이라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의지의 표현은 작가가 추상회화의 본질적 성격에 대해서 정확히 이해하고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상이다. 마크 브리옹은 추상회화를 음악에 가장 근접한 예술이라 보았으며24) 앞서 언급한 칸딘스키 역시도 색과 선의 고유한 표출력에 의해 “마침내 (회화는) 음악이 갖는 완전한 자유를 획득하였고 화가는 전적으로 음악가가 된 것”이라 외쳤다.25) 시각을 대표하는 회화라는 예술이, 청각을 대표하는 음악이라는 장르와 일치된다는 것이 일견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비유일 수 있겠으나 ‘환영(幻影)과 캐논(Canon)’이라는 고유의 법칙을 벗어나 색채와 리듬이 갖는 폭발적인 자유를 연상해 본다면 서로 다른듯한 이 두 예술의 접점을 충분히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접점은 색채와 물질성이 두드러지는 추상에서 보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다.


이춘환이 <빛&결> 연작에서 보여준 이러한 시도들은 한국 추상미술의 역사적 흐름에 그대로 영향을 받았음은 중언할 필요도 없거니와, 나아가 70년대 한국추상이 끊임없이 고민해 왔던 문제들에 대해서도 거시적으로나 미시적으로 중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는 충실한 반증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지식과 감성을 구분하지 않는 동양의 예술정신에 그 맥이 닿아 있는 것이다. 시·서·화 일치라는 문인화 정신에서도 나타나듯이, 동양미술의 우연이나 자발성의 원리 속에는 절제된 정신이 전제되고 있다. 자연의 법칙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이성을 잃는 것으로서라기보다 오히려 명증한 깨달음의 길로 이해하였던 것이다.26) 이러한 지성적 환경 속에서 탄생한, 그리고 21세기 들어서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난 이춘환의 <빛&결> 연작은 70년대 한국적 추상미술 비평의 최전선에 있었던 이일에 의해 ‘탈미니멀 추상’의 정신적인 본질이라 여겨졌던 “독자적인 우리의 자연관을 바탕으로 한 회화세계”27) 를 표현함에 있어서 “물질적 감각적 색채의 차원을 넘어선 색채주의, 수묵화처럼 모든 색채의 잠재성을 그 속에 내포하고 있는 모노크로미즘”28)의 방법론을 적용한 마티에르로 드러낸다는 어려운 예술적 과제를 1989년의 첫 작품에서부터 여실히 해결해 나가려 했던 이춘환의 추상만이 가질 수 있는 소중하고 의미있는 작품세계라 정의해도 무방하다.

 

 


 

 

1) 앙리 포시용(Henri Focillon), 강영주 옮김, 『앙리 포시용의 형태의 삶』, (서울: 학고재, 2001), p.72
2) 앙리 포시용(Henri Focillon), 위의 글, p.72
3) 앙리 포시용(Henri Focillon), 위의 글, p.72
4) 김승환, 「추상미술과 종교성: 몬드리안과 마크 로드코를 중심으로」, 『현대미술학 논문집』, 16(2), 2012, p.85.
5) 모더니즘 예술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많은 저술을 남긴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모더니즘 회화에 대한 자신의 기념비적인 비평인 『모더니즘 회화』에서 마네의 그림들은 그림이 그 위에 그려지는 바탕의 평평한 표면을 솔직하게 선언했기 때문에 최초의 모더니즘 회화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이에 관해서는, 클레멘트 그린버그, 조주연 옮김, 「모더니즘 회화」, in 『예술과 문화』, (경성대학교 출판부, 2019), pp.344-354 에 수록된 글을 참조할 것.
6) 기존의 미술사 서술에 있어서, 어쩌면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타이틀일지도 모르는 ‘최초의 추상화’ 자격은 꽤 오랫동안 칸딘스키(Vasily Kandinsky)에게 주어져 왔으나 최근의 동향은 스웨덴 출신의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에게 주목하고 있다.

7) 이창수, 「한국 현대회화에 있어서 행위와 물성의 상호의존성 – 1970-80년대의 물성회화를 중심으로」, 『예술과 미디어』, 12(3), 2013, p.80.
8) 이창수, 위의 글, p.80.
9) 물론 그린버그 본인이 화면에 대한 논의를 심화하는 과정에서 ‘추상표현주의의 의미란 결국 회화성’이라고 밝히면서 회화성의 근거로 “얼룩지고 뒤섞인 덩어리들, 커다랗고 뚜렷한 리듬, 분절된 색채, 물감의 고르지 않은 채도와 밀도, 드러나 있는 붓 자국, 나이프 자국, 혹은 손가락 자국 등”에 대한 언급을 남긴 바 있다. 특히 물질성이 현저하게 드러나는 유럽의 회화적 추상적 경향에 대해 “눈 가린 저부조 furtive bas-relief” 라고 지적한 부분은 개인적으로 매우 유쾌한 비유라 생각하지만 물질(matiere) 자체에 대한 회화적 가치에 대한 논의라기보다는 당대 추상에서 보여지는 평면성의 의미와 형태성을 보다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본 평자의 오독이 아니길 바란다. 이에 관해서는, 클레멘트 그린버그, 조주연 옮김, 「추상표현주의 이후」, in 『예술과 문화』, (경성대학교 출판부, 2019), pp.355-370을 참조할 것.
10) 앙리 포시용(Henri Focillon), 강영주 옮김, 『앙리 포시용의 형태의 삶』, (학고재, 2001), p.72

11) 노버트 린튼, 윤난지 옮김, 『20세기의 미술』, (예경, 1999), p.242
12) 김정현, 「앵포르멜에 나타난 표현 기법 연구」, 『한국기초조형학회』, 6(3), 2005, p.387.
13) 박소현, 「일본에서의 추상미술과 전통 담론: 한국적 추상미술 논의를 위한 시론」, 『미술사학보』, 35, 2010, p.6.
14) 박소현, 위의 글, p.6.
15) 박소현, 위의 글, p.7.
16) 박소현, 위의 글, p.7.
17) 오광수, 「추상,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미술이론과 현장』, 3, 2005, p.115
18) 윤난지, 「金煥基의 1950년대 그림: 한국 초기 추상미술에대한 하나의 접근」, 『현대미술사연구』, 1995(3), p.91.

19) 김이순, 「1970-80년대 한국 추상미술과 물성(materiality)」, 『미술사학보』, 35, 2010, p.140
20) 오광수, 「70년대 한국미술의 비물질화 경향」, 『에꼴 드 서울 20년 모노크롬 20년』, (관훈디자인연구소, 1995); 김이순, 1970-80년대 한국 추상미술과 물성(materiality)」, 『미술사학보』, 35, 2010, p.140, n.2에서 재인용.
21) 이창수, 「한국 현대회화에 있어서 행위와 물성의 상호의존성 – 1970-80년대의 물성회화를 중심으로」, 『예술과 미디어』, 12(3), p.74.
22) 김승환, 「추상미술과 종교성: 몬드리안과 마크 로드코를 중심으로」, 『현대미술학 논문집』, 16(2), 2012, p.86.

23) 여기서 인용한 세 구절은 모두 민주식, 「추상미술의 미학적 원리: 개념과 장르적 특성을 중심으로」, 『미술사학보』, 34, 2010, p.22 에서 인용.
24) 민주식, 위의 글, p.23.
25) 민주식, 위의 글, p.23.
26) 윤난지, 위의 글, p.107.
27) 이일, 「한국 현대미술의 형성과 전개」, 『현대미술에서의 환원과 확산』, (열화당, 1991), p.98; 정무정, 「한국미술에 있어서 ‘모더니즘’의 의미와 특징」, 『한국근현대미술사학』, 22, 2011, p.65 에서 재인용.
28) 이일, 「한국미술, 그 오늘의 얼굴」, 『한국미술, 그 오늘의 얼굴』, (공간사, 1982), pp.100-101; 정무정, 「한국미술에 있어서 ‘모더니즘’의 의미와 특징」, 『한국근현대미술사학』, 22, 2011, pp.65-66. 에서 재인용.

 

March 3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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