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기운〉, 이춘환의 변곡점

미술평론가 백지홍

이춘환 작가의 작품 중에 〈산의 기운〉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는다면 이견이 있을 것이다. 40년간 화업을 이어온 그의 작품은 다양하고, 미술 작품을 보는 관점은 더욱 다양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의 전체 작품세계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산의 기운〉을 꼽는다면 반대할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춘환 작가의 작품세계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는 바로 그 시점에 등장한 작품이 바로 〈산의 기운〉이니 말이다.


변화의 시작


〈산의 기운〉은 이춘환 작가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미학을 계승하는 작품인 동시에 기존의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형식의 화면을 선보인 작품이다. 예향 남도에서도 남쪽 끝 완도에서 태어난 이춘환 작가는 묵(墨)을 중심으로 오랜 기간 작업을 이어 왔었다.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우면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붓을 들어 서예를 시작했고, 오랜 기간 수묵화를 중심으로 한 작품세계를 펼쳐왔다. 그런 그가 오늘날 아크릴 물감을 주재료로 한 캔버스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흔히 말하는 ‘동양화’에서 ‘서양화’로의 변화다, 그리고 〈산의 기운〉은 아크릴로 제작한 첫 번째 연작이다.


이춘환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변화는 낯선 개념이 아니다. 〈산의 기운〉 연작 이전, 보다 전통적인 수묵화 작업을 이어갈 때에도 이춘환 작가의 작업은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예술가에게 있어 변화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진실한 예술은 그 뿌리를 작가의 내면에서 내린 경우나, 작가를 둘러싼 환경에서 내린 경우 모두 끊임없이 진행되는 미묘한 변화를 섬세하게 포착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시작하기 마련이고, 그 본질은 멈춰있는 것보다는 흘러가는 것에 가까운 것이니 말이다. 사군자에서 시작하여 전통 수묵화를 그리던 이춘환 작가는 1999년 동덕미술관에서 개최한 《자연의 소리》전을 통해 소리와 같이 시각적으로 포착되지 않는 감각을 먹의 번짐을 통해 공기의 흐름을 담아내는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신만의 수묵화 스타일을 완성했다.


그럼에도 〈산의 기운〉이 이례적인 것은 앞선 20여 년 동안의 점진적 변화를 넘어선 보다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난 작품이기 때문이다. 재료의 변화로부터 시작된 작풍의 변화는 적어도 외양적인 면에서는 하나의 단절을 만들어낸 것처럼 보인다. 배경 안으로 스며들어 종이와 일체화되던 먹은 캔버스 위로 쌓아 올라가는 컬러 아크릴 물감으로 변화했고, 자연을 표현하는 방식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현실의 풍경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노력해 온 것에서 벗어나 세부 내용을 덜어내고 단순화시킨 색 면으로 산의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기존의 작업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결과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더욱이 〈산의 기운〉을 발표하기 직전에 개최한 《자연의 소리》에서 선보인 작품들이 공기의 흐름을 표현하여 그림 전체에 역동성을 불어넣은 반면, 〈산의 기운〉은 정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기에 작품에서 느껴지는 차이는 더욱 크다. 기존의 수묵화 작업과 〈산의 기운〉 연작만을 놓고 본다면 한 작가의 작품이란 것을 알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여백과 채움


〈산의 기운〉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화면에 보이는 것은 추상화된 산의 모습이다. 산은 커다란 덩어리로서 제시되며 나무나 바위 계곡과 같은 세부요소는 생략되거나 극히 제한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흔히 한국화가 ‘여백의 미’를 가지고 있는 반면, 서양화는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한다. 그리지 않은 곳에 더욱 많은 것을 담는 것이 한국화의 진수라고 말하는 것은 흔하지만 여전히 설득력 있는 표현이다. 〈산의 기운〉 이전 이춘환 작가의 작품들도 전경의 나무 등은 세밀하게 표현하되 후경은 여백으로 남김으로써 산의 깊이를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해 왔다. 그런 그가 그리지 않은 부분은 말 그대로 빈 공간이 되어버리기에 색을 칠할 수밖에 없는 아크릴과 캔버스를 재료로 택한 후 풍경의 추상화를 택한 것은 논리적 귀결로 보인다. 그리지 않았을 때에만 담을 수 있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산의 기운〉 연작은 많은 것들이 생략된 만큼, 디테일한 요소에 집중하기보다는 전체를 함께 봐야 산으로 인식된다.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색(色)인데, 이 색 역시 일반적으로 산이나 숲을 표현하는 녹색뿐만이 아니라 청색이나 적색 등이 선택된 것이 특징적이다. 계절의 변화나 기상 환경에 따른 색채 변화를 강조한 것임을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지만, ‘사실적인 묘사’와는 거리가 멀다. 변화의 결과 탄생한 작품은 자연의 구체적 모습으로부터 일정 이상 멀어졌지만, 오히려 그 차이로 인해 작가가 감각한 자연의 모습을 더욱 생생히 전달한다.


단순화된 화면을 채운 것은 화면 위로 쌓아 올린 물감이 만든 질감이다. 먹을 사용하던 시기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감각을 화폭에서 펼쳐나간다. 오랜 기간 갈고 닦은 익숙한 재료에서 벗어나 새로운 재료에 도전하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도 개척해야 할 새로운 영토가 작가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춘환 작가의 경우에는 색과 질감이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는 작품의 재료를 변화시키면서, 재료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 작품에 개성을 더하고자 했다. 이 모든 변화가 시작된 연작의 제목 〈산의 기운〉은 작가의 목표를 정직하게 보여준다. 보이는 것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포착하는 것.


시각 너머를 담아내는 것


재료와 표현방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춘환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변하지 않은 핵심가치가 바로 ‘감각할 수는 있지만 눈으로 추적할 수는 없는 것들의 표현’이다. 붓을 잡은 이래 직접 산에 오르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 보고 느낀 것만을 화폭에 옮겨온 그는 보이는 데로 그리는 것만으로는 자신이 감각한 것들을 표현하기에 충분하지 않음을 오래전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를 아는 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미술품 컬렉터이자 서울대학교 약학대 학장이었던 국채호 박사와의 대화는 이춘환 작가의 작품이 나아갈 길을 보다 선명하게 만들었다.


1980년경 완도를 찾아 무명의 20대 작가 이춘환의 작품을 우연히 접하고 그 자리에서 두 점을 구입한 국채호 박사는 완도 밤바다를 가로지르는 어선을 보며 이춘환 작가에게 ‘배의 소리를 그릴 수 있는가?’하고 물었다. 그리고 젊음의 패기가 넘치던 작가는 잠깐의 고민도 없이 ‘그릴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을 작품을 통해 선보이기까지 2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자연의 소리》전은 국채호 박사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개최한 전시지만, 그 세월 속에 국채호 박사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질문을 던진 이는 떠났건만, 질문은 남았다. 사실 새로운 질문은 아니다. 정신을 그림에 담는 것은 이 땅에서 붓을 잡아 온 많은 이들이 추구해온 경지였으니 말이다.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의 화가들에도 큰 영향을 남긴 중국 남제 시기의 화가 사혁(謝赫, 479~502)은 좋은 그림을 그리는 육법 중 첫째로 ‘기운생동(氣韻生動)’을 꼽지 않았던가. 전통 수묵화로 그림을 시작한 이춘환 작가에게 기운을 담는 것은 익숙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의미가 달라졌다. 국채호 박사가 무심코 던진 질문은 미술계의 오랜 질문을 이춘환 작가만의 구체적 질문이자 목표로 만들어주었다.


자연과의 대화


기운을 담아낸다는 목표는 변화의 기점에 선 이춘환 작가에게 명확한 이점이 되었다. 수십 년간 사용해온 익숙한 재료를 떠나 아크릴과 캔버스라는 새로운 재료와 함께 다시 출발선에 서야 했지만, 신진 작가라면 수없이 헤매고 나서야 찾을 수 있는 작품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었기에 무(無)에서의 출발이 아니었다. 흔들리지 않는 목표가 있다면 새로운 재료와 그에 적합한 기교를 익히는 것은 평생을 화업에 천착해온 작가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기법을 익히는 노력은 이춘환 작가에게 생각보다 빨리 보상을 안겨주었다. 새로운 그림이 새로운 애호가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이춘환 작가의 작업 세계에 새로이 빠져든 이들 중에는 미술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군인과 경찰들도 있었다. 〈산의 기운〉 연작 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가로 2m 크기의 대작 〈계룡산의 기운〉(2014)은 육군의 전폭적 지원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육군본부의 작가응모에 선정된 이춘환 작가는 명산으로 유명한 계룡산의 기운을 한 폭의 화면 안에 담기 위해 수차례 계룡산을 등산하고 스케치하며 산의 형태를 다각도로 살펴보았다. 그럼에도 기운을 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고, 작가의 고민을 들은 육군 참모총장의 배려로 헬기를 타고 산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할 기회를 얻었다. 하늘에서 산의 전체 모습을 살펴볼 수 있게 된 작가는 소음과 진동으로 가득 찬 헬기 안에서도 수많은 스케치를 남겼고, 〈계룡산의 기운〉은 완성될 수 있었다.


결국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될 것임에도 수많은 스케치가 필요한 까닭은, 산이 작가에게 건네주는 기운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자연의 일부이기도 한 우리는 시각, 청각, 후각 등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 자연과 소통하고 본능적으로 그 성격을 파악한다. 첫인상을 통해 마주한 자연의 많은 부분을 알아낼 수 있지만, 그 구체적 성격을 단단하게 조형하기 위해서는 다른 각도와 시간을 통해 자연을 입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그 결과 탄생한 〈산의 기운〉은 작가라는 필터를 통해 거르고 걸러진 산의 핵심 요소 ‘기운’을 담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자연과 대화를 이어나가며 자연의 핵심요소를 담아내는 동안 작가의 내면이 자연과 동일화된다는 점이다. 한국의 자연을 그리는 이의 내면은 한국의 자연을 담게 된다. 이춘한 작가는 중국 등 해외 작가들과 함께 전시를 개최하며 이 사실을 깨달았다. 각자 개성 넘치듯 보였던 화풍은 각 작가가 나고 자란 자연의 모습과 닮았음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한국의 자연을 그리던 작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나 당연하게도, 각 작품을 관통하는 ‘한국성’이라는 특징을 얻게 되었다.


〈산의 기운〉 너머
‘한국성’은 묵에서 시작하여 〈산의 기운〉을 거쳐 오늘날 〈달항아리〉, 〈빛+결〉과 같은 작품으로 이어지는 이춘환 작가의 작품 세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특성이다. 전통방식으로부터 시작한 수묵화 작업은 물론이고, 한국의 산하를 담은 〈산의 기운〉의 질감 표현은 그 재료가 서양에서 수입된 것임에도 박수근(1914~1965)과 같은 작가에게도 나타나는 ‘질박함’과 닮았으며, 이후 등장하는 〈달항아리〉는 그 한국적 소재를 향한 작가의 연구가 응축된 작업이다. 완전한 추상 작업처럼 보이는 근작 〈빛, 결〉 역시 고향 바다의 달빛을 수묵과 담채로 담아냈던 동명의 1980년대 작업에서 시작한 작업이다. 그야말로 수묵화 작업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동안 작가가 만들어온 작품들의 요소가 층층이 쌓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그 안에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존재하는 것은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이 그가 나고 자란 한국의 자연과 문화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춘환 작가가 오늘날 보여주는 것은 전통의 계승과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변화하는 것이 꼭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할 수 있는 것이며, 서로가 서로의 가치를 더욱 높여줄 수 있다는 것 아닐까.


먹에서 아크릴로의 변화의 시작점인 〈산의 기운〉이 보여준 것은 단순한 방향 전환이 아니라, 새로운 영역으로의 작품세계의 확대라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산의 기운〉은 지금도 작가의 작업실에서는 〈달항아리〉, 〈빛, 결〉과 함께 신작이 제작되고 있는 현재 진행형 작품이기도 하다. 그 모습은 과거의 작품으로부터 이어졌으되, 항상 새롭게 탄생하고 있다. 변화하지 않는 작품은 생명을 잃은 것과 같고, 자신만의 중심이 없는 작품은 쉽게 흩날리곤 만다. 둘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것은 오랫동안 작업을 지속한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와도 같다. 이춘환 작가는 능숙하게 균형을 잡으며 창작을 이어가고 있으며, 〈산의 기운〉은 그 상징적인 작품이다.

March 3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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