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을 넘어서: 런던에서의 이춘환 톺아보기

조지타운 대학교 미술사가 이안 볼랜드

 

지난 수십 년간의 한국 전시에 이어 런던에서 이춘환의 작품을 만나는 드문 기회는 우리가 그의 작품을 그 자체로 감상할 때 비로소 값진 선물로 다가온다. 강렬한 색과 풍부한 질감을 가진 이춘환의 산들은 유럽의 관객들에게 이전에 본 적이 있는 듯한 익숙한 인상을 줄 수 있지만, 그것은 오산이다.


한국 화가들은 최근 수십 년간 글로벌 아방가르드(global avant-garde)에 형식적, 개념적으로 밀접히 연계된 채 현대 미술 시장의 주류로 활동하고 있다.1) 1960년대에 시작된 추상 회화는 양식과 의미를 중심으로 한 초국가적(transnational) 대화가 권영우, 이우환 등의 단색화 화가들에 의해 새로운 방식으로 구체화된 중요한 실험 영역이다. 더 최근에는 주로 정치적 색을 띤 후기 형식주의 양식의 퍼포먼스, 설치, 렌즈 기반의 미디어 작품이 젊은 세대들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2)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뿌리내린 섬 Rooted Island》 전시에 소개된 이춘환의 작품들은 조형적으로 대단히 흥미로움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미국에서 풍경화 장르가 전성기를 이뤘던 19세기로 회귀하는 시대착오적 작품들로 보일 수 있다.


이는 100여 년 전 유럽 모더니즘의 도래가 풍경화, 특히 그 영적 함의에 대한 광범위한 의혹을 불러일으킨 것만큼이나 많은 면에서 뜻밖으로 다가올 것이다.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n)이 네덜란드 해안의 광활한 바다를, 폴 세잔(Paul Cézanne)이 프로방스의 찬란한 언덕을 그리는 화가로 시작했으나 이후 변화를 보인 것과 같이, 그들을 비롯한 수많은 화가들은 결국 추상의 거침없는 ‘정제(purification)’와 평평한 기하학적 구조화로 특징지어진 세계의 ‘요체화(elementarization)’에 매료되었다. 결과적으로 폭풍우가 몰아치는 산의 압도적인 숭고함이나 지난 세기에 걸쳐 발견된 아름답게 굽이치는 강은 무한한 색채 속으로 사라졌다. 자연환경에 대한 감정 표현은 추상의 역사 속으로 자취를 완전히 감춘 것은 아니었으나 잠시 떠오를 뿐이었다.


이러한 회화에서 추상으로의 전환은 많은 이들에게 현대성의 동의어였다. 따라서 풍경화와 같이 한때 지배적이었던 장르를 이어오던 이들은 그들의 작품이 향수 또는 진부한 표현으로 여겨지는 위험을 감수하게 되었다. 이는 많은 모더니스트의 입장에서 풍경화의 가르침은 이미 내면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나, 역설적으로 그 가르침은 이춘환이 다루고 있는 동아시아의 전통을 유용한 것이었다. 사실, 19세기 중반 지배적이던 학문 방식을 탈피한 유럽의 화가들이 한국과 일본에서 수 세기 동안 제도화된 대중적 풍경화에 눈을 돌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메리 카사트(Mary Cassatt),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그리고 그들 각각이 속한 집단의 경우 에도 시대 우키요에(浮世絵) 판화의 시각 문화에 심취했다.3) 이처럼 많은 예술가들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담은 회화의 가치에, 그리고 도시 밖의 환경을 표현하는 과감한 선이나 색의 힘에 감명받았다. 몇몇 이들은 동아시아 문화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으나(한국과 일본 간 문화 교류의 역사는 분명 그 자체로 복잡하다), 고전 한국화는 초기 유럽 모더니스트들의 반향을 불러일으켰을 양식적 요소를 다수 포함하고 있다. 그 예로 17-19세기에 꽃을 피운, 실제 경치의 묘사와 한국 산천의 인상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진경산수화'를 들 수 있다.


조선시대 정수영과 같은 화가들의 수묵담채화 작품은 후기 인상주의와 이춘환의 가장 최근 작품의 명백한 전조가 되는 숲과 산 묘사의 대담한 추상적 접근을 보여준다.4) 한국의 역사에서 풍경화가 유서 깊은 전통이었던 반면 유럽에서는 낭만주의의 감정과 픽처레스크(picturesque) 미학과 결부된 채로 상대적으로 깊게 뿌리내리지 않았다. 초기 모더니스트들은 그들의 작품에 새로운 초자연적 또는 기술적 에너지를 불어넣기 위해 유럽 제국의 가장자리에서부터 얻은 가르침을 적용했지만 그들의 동아시아 미술과의 교류는 피상적이었을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로 국한되었다. 이후 몇 년간, 특히 미국 군인들이 한국과 베트남을 포함한 태평양 지역에 주둔했던 시기에 아시아 미학에 대한 관심이 부활한 것은 사실이다. 이와 함께 동시기에 나타난 아방가르드 문화와 정신성의 영역에서 일어난 문화 교류는 후기 모더니즘의 주요 인물들의 실험적 작품들이 대승불교의 계율에 심취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존 케이지(John Cage),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마이너 화이트(Minor White) 등이 D.T. 스즈키(D.T. Suzuki)의 글이나 대중화된 힌두 신비주의의 형태에서 명백히 영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흐름은 시장과 역사적 기록에서 오랫동안 경시되어 왔다. 큐레이터 알렉산드라 먼로(Alexandra Munroe)는 2009년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시아 미술과 사상에 대한 미국 화가들의 관심이 주목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동양 철학과 미학 용어를 정의한 제대로 된 연구는 없었다. … 현대 미국 미술과 아시아 고전 미술 및 철학 체계 사이의 교차점을 논하려면 그 두 주제와 그에 따른 서로 다른 담론을 잘 알고 있어야 하기에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 둘은 전통적으로 각각 학계와 미술관에서 별개의 영역으로 존재해왔다.”5) 요컨대 모더니즘의 세속적 경향과 현대 미술계 담론에 지배적인 공정한 '비판성(criticality)'은 이춘환의 것과 같은 작품의 핵심에 있는 정신적 차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재측정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즉, 실재하나 오랜 시간 수면 아래 잠겨 있던 지역 간 교류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6)


풍경화는 정서적, 정신적 함의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감수하고 여러 방면에서 점차 ‘서양’의 현대미술로 복귀했다. 실제로 1970년대까지, 다양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적 접근법은 초기 풍경화 작품들을 남쪽의 개발국들과 그보다 더 가까이 위치한 구미(欧米) 식민지 프로젝트의 본질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7) 동시에 그 시대의 ‘뉴 토포그래픽(new photographic)’ 계열의 사진작가들과 에드워드 버틴스키(Edward Burtynsky), 리처드 미즈락(Richard Mishrach) 같은 후계자들에 의해 현대적으로 변모한 풍경화는 영토 확장과 환경 파괴를 비판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 밖에도 더 아이러니한 범주로 되살아났는데, 정서적 연관성을 드러내는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enstein)이 1965년에 시작한 파노라마 적 일출 및 일몰 전경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상징 게임으로 되살아났던 오래된 장르, '풍경화'가 갖는 의미였다.


데이글로(day-glo) 마그나(magna) 색채를 사용하여 강렬하고 생생한 리히텐슈타인의 ‘팝(pop)적인’ 풍경화는 아마 많은 이들에게 이춘환의 《Rooted Island 뿌리내린 섬》 작품 선에 가장 유사하게 느낄 시각적 선례일 것이다. 특히 〈산의 기운 #49>(2019)과 <산의 기운 #427>(2021)이 그러할 텐데, 사실 시각적 유사성을 제외하면 이춘환이 선보이는 운봉을 비교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된다. 이춘환의 작품은 비교적 얕은 미국의 선례들을 넘어 더 이전의, 리히텐슈타인에게 영향을 준 미술사적 흐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그 전통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다. 유럽 중심의 미술계에 낯설게 다가올 그의 작품은 한국 미학적 기준의 재구성이다. 다른 평론가들이 언급했듯 이춘환은 숙련된 수묵화가로서 먼저 두각을 나타냈고, 지난 10년의 기간 중 실험적인 작품으로는 오방색이 얽히고설킨 배경 가운데에 달항아리를 배치하며 조선 후기의 소박한 백자를 담아낸 작품을 말할 수 있다.


《Rooted Island 뿌리내린 섬》의 풍경은 분명 굽이치는 안개나 물줄기에 휘감긴 한국의 산봉우리를 묘사한 전통 수묵화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춘환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에는 고(故) 법정 스님과의 우연한 만남에서 기인한 한국 불교의 요소가 미묘하게 스며들어 있다. 이 만남으로 인해 이춘환의 접근 방식은 있는 그대로의 묘사에서 주변 사물과 풍경의 덧없음에 대한 통찰을 상기시키는 추상의 흐름으로 전환했다. 다시 말해, 〈산의 기운〉 연작에서 작가는 일견 친숙해 보이는 회화적 접근 방식을 새로이 재구성하며 형식과 정신의 통합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별개의 작품을 ‘차이’로 인한 환원주의적 사례로 축소하는 현대 시장의 흔한 오류를 반복하지 않도록, 우리는 이춘환의 작품을 본질적으로 ‘한국’ 미술로만 규정하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이춘환의 접근법은 단순한 과거의 반복이 아니며, 명백히 독창적이다. 작품 속 산들은 그가 나고 자란 한반도 최남단의 완도라는 특색 있는 장소를 기반으로 한다. 전통 한지와 돌가루의 활용은 캔버스에 거친 질감을 더하는데, 가로로 긴 캔버스에 작업하기로 한 그의 선택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물성은 역사적 선례와의 분명한 결별을 나타내며 혼합 재료나 조각 작품에 활기를 불어넣는 전 세계적 흐름에 대한 확장된 교류로 이어진다.


눈 덮인 산맥과 회화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이 강렬한 봉우리들은 런던뿐만 아니라 서울까지 울림을 줄 것이다. 그러므로 이춘환 회화의 도전은 그것이 맥락에 따라 읽히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친숙한 언어를 사용하는 데 있다. 따라서 어떠한 예상에서도 벗어나기 위해 이 산들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 즉 우리가 선입견 없이 바라봐 줄 것을 요구한다.

 


 

 

1) 이에 해당되는 사례는 너무 많아서 모두 언급하기 어렵다. 개괄은 다음 참조. Keith B. Wagner, Sunjung Kim, “The Gwangju Biennale, Busan Biennale, and Mediacity Seoul: Co-Cultural Aspirations and Globalization in Korea,” in Korean Art from 1953: Collision, Innovation, Interaction, ed. Keith Wagner, et al. (London: Phaidon, 2020), 209-245.
2) Joan Kee, Contemporary Korean Art: Tansaekhwa and the Urgency of Method (Minneapolis: The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3) 참조.
3) 이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1880년대 후반에 작성된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의 여러 편지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예시는 다음 참조. Herschel B. Chipp, ed. Theories of Modern Art: A Sourcebook for Artists and Critics (Berkeley: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8), 11-47.
4) Yi Sōng-mi, “Artistic Tradition and the Depiction of Reality” True-View Landscape Painting of the Chosōn Dynasty, in Arts of Korea, ed. Judith G. Smith (New York: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1998), 331-365 참조.
5) Alexandra Munroe, “The Third Mind: An Introduction,” The Third Mind: American Artists Contemplate Asia, 1860-1989 ed. Alexandra Munroe (New York: Guggenheim Museum Publications, 2009)와 Harry Harootunian, “Postwar America and the Aura of Asia,” in the same volume, 45-55 참조.
6) Ming Tiampo, “Originality, Universality, and Other Modernist Myths,” in Art and Globalization, ed. James Elkins, et al. (College Station: Penn State University Press, 2010), 166-170 참조.
7) WJT Mitchell, ed., Landscape and Power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4)에 요약된 내용 참조.

 

March 3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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