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잠과 로토스가 있는 땅에서

글. 이윤정 (서정아트 선임 큐레이터)
SEOJUNG ART Senior Curator Yunjung Lee


관계라는 범주 안에서도 연인과의 사랑은 꽃 피는 낭만, 벅차오르는 감정을 먼저 떠올리게 하기 마련이다. 누구나 생각하는 이상적인 관계는 수많은 난관을 함께 헤쳐 나가면서 시선은 서로를 향해 있어야 할 것이며 환희가 가득한 순간이나 고조된 갈등 속에서도 항상심을 잃지 않는 것일 테다. 그러나 현실에선 한없이 외롭고 어려운 길, 마치 풍랑을 만난 배가 정처 없이 떠도는 듯한 경험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사이먼 고는 사랑을 짚어 한 단어로 정의하지 않았음에도 어딘가 절제되고 정제된 감정을 담아낸 듯한 그의 화면을 보면 작품 전반을 아우르는 무게의 추는 속삭임 보다는 침묵에, 희락보다는 침착에 기울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Mellow Island》에 전시된 작업들은 특히 심리적 거리에 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큰 거울에 반사된 두 남녀를 비추는 'The Real One' (2023)에서 분명 이 둘은 물리적으로 손 닿을 듯한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시선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해있다. 남자의 표정은 상념에 잠긴 듯 어두우며 거울을 쳐다볼 뿐, 무심하게 떨군 여자의 고개 역시 무거운 정적을 가늠하게 한다. 표류하는 배 안에 갇힌 두 사람의 극적인 상황을 연출한 'Away' (2023)에서도 마찬가지다. 찢어진 닻과 검은 연기에 휩싸인 둘은 의지할 곳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 언제 어디서 정박할지 모르는 끝없는 항해, 실재하지 않아서 더 갈망하게 되는 환상 속 낙원 ‘멜로우 아일랜드'는 상상에나 존재하는 매력적인 종착지인 만큼 다가갈 수록 멀어진다. 바다를 표류하는 배는 이들의 관계를 단결하게 하기는커녕 늘 목마르게 한다.


풍랑과 항해

'Stopover' (2023)에서 정박한 배를 고치며 낙심한 채 고개를 숙인 남자의 모습은 마치 오디세우스의 해상 표류기를 연상하게 한다. 10년에 걸친 여정을 담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Odysseia》에서 오디세우스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끝없는 고난을 겪는다. 폴리페모스에 의해 동굴에 갇히거나 세이렌의 유혹에 위협받는 등 그의 험난한 여정은 계속되지만 항상 그 언저리에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다. 난파를 당해 파이아케스인들의 섬에 상륙했을 때는 그들의 환대로 잠시나마 힘을 얻었고, 절망적인 순간에는 구원의 손길이 닿아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었다. 20년 만에 돌아온 고향에서도 아내 페넬로페를 구하는 일이 마지막 관문으로 남아 마치 인간의 인내를 시험하는 듯했지만 행복한 결말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사이먼 고의 작업에서 포착된 여러 가지 감정이 결속된 관계, 정서적 교류안에서 겪는 사랑의 딜레마는 오디세이아의 몇 번째 장막과 같을까. 부와 영생을 약속하며 오디세우스를 붙잡으려 유혹했던 칼립소를 뿌리치는 순간이었을까, 자신의 몸을 닻에 묶어 세이렌 섬을 통과하는 극적인 순간이었을까. 아니면 사명을 잃지 않고 본래의 목적지로 나서는 용감한 영웅의 행보는 애초에 이 그림에서 읽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이먼 고의 작업에서는 종종 잠자는 인물이 등장한다. 위험천만한 상황이 펼쳐지는 'Away' (2023) 속 한 장면에서 남자는 깊은 잠에 빠진 듯 보이며 'A Gathering' (2023)에서 여자는 달콤한 잠에 취해있다. 같은 공간 안에서 다른 꿈을 꾸듯 눈을 감고 있는 두 사람을 포착한 'Sanctum'  (2023)에서 심리적 거리감은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멜로우 아일랜드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쩌면 이들은 잠의 힘을 빌려야 할 것이다. 현실적인 대안을 구하지 못한 상황에서 빠져든 잠은 일시적인 도피처로서 매우 달콤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적이지 않음을 깨닫는 순간, 행복은 이어질 수 없다.


로토파고이족이 오디세우스에게 건넨 열매 로토스는 달콤하지만 기억을 잃게 한다. 확고한 목적의식마저 한순간에 상실하게 만드는 로토스는 귀향할 의지를 완전히 꺾어 현실에 안주하게 한다. 잠에 취해있는 동안 도달한 낙원은 실재하지 않았다고 해서 경험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들이 도달한 낙원에서의 경험이 다만 지속적이지 않았을 뿐이다. 호메로스는 “잠은 눈꺼풀을 덮어 선한 것, 악한 것, 모든 것을 잊게 하는 것”이라 했다. 고전 문학부터 이어진 잠의 양면성은 그것이 일시적임을 암시한다. 사랑이라는 깊은 감정으로 엮였지만 그 어떤 지속성도 장담할 수 없는 관계. 사이먼 고의 작업에서 잠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을 때 잠시나마 그것을 잊게 하는 모티프이며 로토스다.

 

이처럼 작업의 단편들은 이야기의 한 장막을 포착한 것처럼 앞으로 펼쳐질 서사를 상상하게 한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색감은 정확한 시간대를 알 수 없게 하며 제3자가 몰래 보는듯한 시점과 조금은 어색한 초현실적인 구도, 그리고 무표정한 인물들은 마냥 유쾌한 상황만을 표현한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장소 또한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아 주변 사물로 하여금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작업들은 지난날들의 기록이 아닌 현재 진행형에 가깝다. 꽃을 들고 호텔 방 안에서 상대를 기다리는 일,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며 가구를 고르는 일, 파티를 준비하는 과정은 모두 관계의 마침표가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시작인 셈이다. 포개어진 감정 안에서 싹 트는 사랑의 불꽃은 순간적이지만 그것을 지속적이고 아름답게 지켜나가기 위한 여정은 험난하다. 작가는 그러한 과정에서 얻는 성숙과 성장에 대한 성찰, 그러기 위해 멈추지 않는 항해를 예견하며 가상의 섬으로 나아간다.


이들의 항해가 끝나는 날, 정박한 배에서 내린 두 사람이 여정 끝에 도착한 섬은 실재하는 낙원일지, 아니면 일시적 유혹 안에 숨겨진 함정일지는 알 수 없다. 전자라면 아름다운 결말을 위해 축적된 인고의 시간이 되지만 후자일 경우 이들의 긴 모험은 한 순간 소모되고 실패한 시간으로 전환된다. 설령 각자의 종착지가 다르더라도 그 시간을 무의미하다고 주저앉기에는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계속해서 나아가야 한다. 마치 사이먼 고의 표류하는 뗏목처럼.

 

March 1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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