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가 오정은
어느 화가의 전의식이 투영된 그림이 여기 있다.1)
그것은 그림을 보는 자의 눈을 통해
마음 속 이미지의 자리로 옮겨간다.
깊은 심상의 바다를 항해하기 시작한다.
사라지거나, 섬이 되어 정박할 운명을 안고.
Everything and Nothing2)
여기,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쪽을 택할까? 양 기로 앞에서 어떤 움직임이 분주하다. 운명의 갈피를 가를 영혼의 열띰이 그렇다. 그것은 파도 같은 찰나에 결정하고 분류해 내야 하기 때문에 바쁘다. 우리가 쓰는 ‘생존’이란 말은 매 순간 부단한 그 일에 대한 축약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몸은 잠시 동안 눈을 감음으로써 그 바쁜 동력의 짐을 일부 덜어내 주려 한다. 하루에 약 15,000번, 우리는 눈을 깜빡이고 그때마다 뇌는 망각하거나 저장한다.
잊거나 기억하기. 선택에 따라 휘발돼 사라질 것은 의미와 결부되지 않은 채 ‘아무것도 아닐 것’으로 지나간다. 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잔상’은 뇌리에 박혀 눈을 감아도 선명한 이미지로 점점 그려져 나간다. 이 글은 그런 이미지에 대한 고찰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힘을 가져 꿈에 반복해 출연하고, 현실에 데자뷔처럼 등장하는가 하면, 기시감으로 다음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것. 미술로 치자면 텅 빈 화면 위에 굳힌 안료로 묘사되고 사진처럼 고정돼 인상적으로 분한 뒤 보다 오랜 기간 공유되는 것. 그런 것들의 흔적 모음인 사이먼 고의 작업을 비평한다.
Mellow Island
사이먼 고의 화면은 일상과 꿈을 오가며 현실과 비현실 사이 경계에 서기를 자처한다. 뇌리에 남은 자전적 잔상과 회화적 상상이 투영된 것들이 상호 교차하며 혼종의 중간 영역을 지킨다. 그것은 곧이어 다시 누군가에게 아무것도 아닐 수도, 혹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만큼의 영향을 준다. 전시라는 매개를 통해서다. 나는 기나긴 해풍을 맞고 섬에 도달한 무엇이 다시 심해로 떠나갈까, 섬에 잔류해 머물며 자기 자취를 새겨둘까 고민하는 장면을 사이먼 고의 작업 앞에서 떠올리곤 한다 절대신이 지정해 통보한 유일무이한 . 답안 없이, 오직 자기 스스로 선택한 파장을 책임지며 살아가는 존재의 상황을.
존재론적 고민에 빠진 듯,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사람은 사이먼 고의 작업에 주된 도상으로 연달아 출현하였다. 눈 감은 그들을 우리는 뜬 눈으로 이쪽에서 쳐다보곤 한다. 그러면 회화 안팎의 기묘한 공존 관계 속에, 재연된 이미지가 실재계의 우리와 마주하게 된다. 현실의 우리는 그쪽을 보지만 그림 속 그들은 이쪽에 대한 아무런 의식 없이 자기 일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맥북을 키고 앉아 있거나, 기타를 켜고 있거나,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거나, 혹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식으로. 바닥에 기대거나 누워 잠을 자는 듯한 이도 있다. 쓰러진 오필리아(Ophelia)의 망령처럼 수면에 잠겨있기도 하다(‘Slow Waters’). 그들은 이쪽의 우리와 눈 맞춤을 하지 않는다. 예외적으로 ‘The Real One’에서는, 전면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남성이 그려져 있지만 그조차 거울에 비친 일행 여성이나 그 거울 및 그림 밖의 우리하고는 시선을 공
유하지 않고 있다. 그 같은 타자성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습은 그러나, 마치 익숙한 캐릭터처럼 친근하고, 현대의 보편적 군상에도 이격 없이 어우러진다. 박수근이 화강암 가루를 섞어 특유의 거친 텍스처 질감으로 표현했던 소박한 바들의 정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사이먼 고가 수행하듯 되풀이한 것들-인형처럼 단순화된 안면 묘사, 약간의 음영감을 띨뿐 평면성이 강조돼 더 그림 같은 신체,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된 색감과 그와 대조적으로 울퉁불퉁하게 도드라진 표면, 그 표면의 요철 때문에 강경함을 잃은 선의 흐릿함-이 거기 이유에 나름으로 가담한다.
그들 인물은 동류의 방식으로 표현된 사물과 배경에 함께 있다. 자연물과 인공물이 중립적인 중량감으로 그림 속에, 작가가 떠올린 상황 속에 어우러져 있다. ‘Away’, ‘Breather’, ‘Sanctum’, ‘Scorched’과 같은 제목에서 그 상황의 어렴풋한 단서를 얻을 수 있지만 단일한 시간과 단적인 장소로 좁혀지는 답은 없다. 다만 다중의 시공간이 뒤섞여 그림 안에 하나로 엮인 모습일 뿐이다. 서로 다른 크기로 나뉜 프레임이 벽지나 창문, 거울에 빗대어져 회화 내부의 각진 면 분할을 일임하고 있고, 조명이나 별빛, 풍선, 저글링 공 같은 것이 곡면을, 식물 잎사귀, 커튼이나 깃발의 드레이프가 율동감 있는 비정형을 담당한다.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사이먼 고 작품 대부분에서 연달아 관찰되는 특징이 그렇다. 그는 주제와 부제를 구분할 원근법의 차등 없이 단순한 추상과 재연된 실체, 혹은 허구적 요인 모두를 메타픽션에 담았다. 화
면은 여러 개의 소실점이 뒤엉켜 있어 관람자가 보는 것은 다차원의 이미지 조합이며 관념적이고 비실재적인 풍경이 된다. 화가가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린 게 아니라. 보고 난 뒤 상념처럼 뇌리에 남은 것을 그려낸 것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구체적인 일상의 요소가 그림 내부에 있는 한편,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준다. ‘Stopover’처럼, 입체로 제작된 작업에서도 그 성질은 유지됐다. 재료를 달리 한 다시점의 조각임에도 그림에서 갓 튀어나온 것 같은 표면과 그에 회색 데생으로 드리워진 광량 표현의 인위적 연출이 지켜지고 있다.
작품 속 인물은 꿈을 꾸며 자는 것 같기도 하고 명상하며 다른 차원을 유영하는 것 같기도 하다. 깊은 내면에 잠겨 고요한 낯빛을 내는 성상처럼, 눈을 감고 무아(無我)에 빠진 표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자기를 직면하고 지켜내는 정적인 시간에, 역으로 자기멸각(自己滅却)을 기하는 자의 모습이다. 고독과 불안에 대응하는 아련하고 평온한 감각이 사이먼 고의 화풍에 밀착해 머무른다.
그래서다 사이먼 고가 라 이름 짓고 공개하는 . ‘Mellow Island’ 이번 전시의 신작에서 익숙함과 생경함을 함께 느끼게 되는 것은. 전작에서부터 자주 등장해온 젊은 연인의 모습이 사랑과 단절의 여운을 동시에 주고 있음을 지각하게 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중요한 무엇이 될 수도 있는 운명과 거기 얽힌 지난한 관계의 갈림길, 그 계속되는 삶의 도전적 서사 앞에 오로지 1인칭으로 실존한 자를 직시한다.
풍랑 속에 표류하다 어느 날 당도한 섬과 같은 곳에서 작가 자신의 페르소나일 수도, 그와 비슷한 혹자-어쩌면 그와 동화된 나 자신-일 수도 있는 형상을 목격한다. 눈 맞춤을 하지 않던 바에 시선을 던지고, 보지 않고도 마침내 떠올린다. 흐린 잔상을 진한 각인의 영역으로 점차 옮겨 그것이 배양한 사색에 젖어든다. 사이먼 고의 작업이 공명하는 바다. 심상의 세계에 유유히 들어가,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들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존재하게 하는.
1) 전의식(preconsciousness): 무의식과 의식의 사이에 있는 것으로, 당장은 의식되지 않지만 생각해 내
려고 하면 떠오르는 정서나 심상 같은 것.
2) 이 문장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의 단편소설 「Everything and
Nothing」에서 차용했다. 소설은 인간의 주체적 삶에 대해 철학적으로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