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윤정 (서정아트 선임 큐레이터)
SEOJUNG ART Senior Curator Yunjung Lee
공간의 주된 흐름을 아우르는 피정원의 주조색 검정은 모든 작업의 얼개를 하나로 통칭할 수 있는 장치로서 주체적 해석을 유도한다. 특정 모티프 없이 편평한 블랙 젯소 위에 쌓이는 물감의 층들을 마주하기 전까지, 우리는 어떤 개별적 요소들이 작가의 삶을 대변하는 형상으로 드러날지 예측할 수 없다.
개별적인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다가 마침내 소멸한다. 그것은 삶의 형태가 켜켜이 쌓이는 기록 같은 것이 아니라 흩어지고 쪼개어지는 공허함과 오히려 닮아있다. 생활의 터를 옮겨가며 다양한 환경을 접할 수밖에 없던 작가는 그렇게 마주한 모든 가변적인 요소로부터 온전한 ‘나’의 존재, 즉 보편적인 것을 지켜내야만 했다. 타향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던 이라면 겪었을 파편화된 기억과 소실의 반복은 각개의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생긴 부조화 안에서 질서를 찾게 하여 그것을 정립하고 고정하는 일을 추동한다. 작가 피정원이 사용하는 검정은 수많은 가변적 요소 가운데 연쇄적 개입을 이끄는 골자와도 같아, 보는 이로부터 정체성에 관한 추측을 유도하며 상상하기를 고무시킨다.
또렷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더 두려운, 어쩌면 미래를 예측할 수 없어 느끼는 막연한 감정을 표상하는 '무제: 검은 길 Untitled: The Black Path (2019-)은 그렇게 ‘일시성’이 발생하기 이전의 날 것 그대로, 그래서 더 순수한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자아내면서 표면적인 것에 가려진 기의에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이후 표면에 덧댄 용제(溶劑)는 작가의 기억, 무의식, 경험과 같은 것들로 가시화되어 조화와 대비를 오가며 우리를 깊은 내면으로 인도한다.
보들레르는 '영원한 것'과 '순간적인 것'의 결합인 예술의 이원성을 주장하면서 이를 미(美)가 가진 자율성과 예술가가 지닌 상상력으로 설명했다.[1] 현대성으로 통칭하는 이 같은 이원론적 관점은 일시적, 순간적, 우연적인 어떤 아름다움 안에서도 우리가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할 ‘본질’, 즉 영원한 것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관념을 내포하고 있다. 작가의 시선이 외부 요소로 옮겨가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형성하는 데에 집중할수록 색채가 주는 무거운 공기와 무한에의 갈망, 그리고 더 나아가 정신성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적 행위는 더욱 견고해진다. 작가의 또 다른 시리즈 'Untitled: Future', 'Untitled: Line' 등 이외의 모든 작업들을 상기해 보면, 검게 물든 캔버스 전체가 개별적인 요소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상태로 보이는 것이 그 이유다. 전체 속의 부분으로서 나타나는 기하학적 도형, 그로 인해 무의 상태를 더욱 극대화하는 검정 캔버스 표면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힘은 이질적인 재료가 혼재된 여백과 매끄러운 표면 사이의 긴장감 속에서 작품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돌아보게 한다. 강력한 힘을 고수하는 동시에 하나로 집약되지 않고 각각의 개별성을 돋보이게 만드는 이항대립적 성격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현재에 있는 ‘나’를 과거로 이끄는 것이다.
여기서 인지해야 할 점은 사실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작가의 이고(Ego)를 담은 검정 캔버스가 아닌, 그 위에 쌓인 물감층, 크고 작은 균열과 흐름의 유동하는 성질이라는 점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검정’이 시각을 압도한다고 믿어온 우리의 관념을 전복시킨다. 캔버스 중앙에 자리한 수직적 형태의 견고함에서 다가오는 불완전함은 기호적 도형에서 기대할 수 있는 많은 요소를 져버림으로써 가변적 속성을 극대화한다. 또한, 캔버스 위 물감 덩어리들이 무한 증식하며 빚은 불규칙한 굴곡은 ‘나’와 타인의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이자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변곡점이기도 하다. ‘Untitled: Crystal’에서 지속적으로 보이는 흐르는 형태는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들을 드러냄과 동시에 보편성을 숨기는 작업으로서 경험을 비시각적으로 재현한 결과다. 그러나 이 재현은 극적인 변화를 의도한 결과가 아니다. 혼재된 경험의 조각들을 불러 모아 하나씩 다시 정립하는 행위 자체가 작업이 되기에, 피정원은 과거를 회상하는 여정을 그 행위에 담기 위해 더 기억하고, 분석하고, 왜곡된 실체를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한다.
발화에서 담화로 이행하는 과정
갈라지는 틈새, 그 안에서 흐르는 유동적인 성질들, 그리고 액체의 보존을 위한 일련의 작업 행위들이 시간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대변함과 동시에 작가의 모든 고민과 결실을 재현한다. 이때 캔버스 틀을 벗어나 공간과의 경계가 허물어지면 라스코 동굴 벽화가 주는 아우라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다. 검은 길 시리즈를 이어 붙인 대형 작업이 전시되었던 공간은 나(I)의 존재와 타자의 경험이 맞물리는 시점이 교차해 그 자체만으로 신비감을 주는 신성한 공간으로 변모하는 것이다.[2] 빛을 차단한 공간에서 작가의 블랙 젯소는 경계를 지우고 무한한 공간 안에 갇힌 듯한 경험을 주는데, 여기서 관람객은 ‘나’를 잊고 온전한 발화에 집중하게 된다. 조용한 몰입만이 남은 순간에서 주체의 인지 행위에 의존한 결과는 스스로 나를 지워 작가의 세계에 걸어 들어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단단함 속에 피어나는 모호한 형태는 무한의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위아래가 대칭적으로 양분되는 화면과 중앙을 가로지르는 경계, 그 아래 자유롭게 흐르는 물감층의 굴곡은 작품을 바라보고 서 있는 관람자 신체를 통해 직접적으로 우리가 본 것에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이처럼 관람자의 시선에 들어오는 추상적 기호들은 특정 대상을 연상케 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더욱 깊숙한 심연(深淵)의 길로 이끈다. 캔버스는 하나의 틀이 아닌, 타자의 존재를 안음으로써 공간과 작업의 하나됨은 도약을 위해 벗어나야 하는 삶의 무게로부터 오는 언캐니(Unheimlich)한 감정들을 보여준다.
그의 작업에서 피정원이라는 정체성은 드러나지 않지만 미묘하게 처리된 익명의 작가로서 그가 선택한 재료와 기법, 행하는 과정을 통해 경험의 실체를 공유하며 두각을 드러낸다. 그러한 행위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확인하며 얻는 심리적 기제는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마주했을 때 발생하는 발화(發話) 행위를 통해 증폭된다. 작품을 마주한 관람자는 각각의 경험이 상충하는 현장에서 ‘무제’가 발하는 시각물을 통해 합을 이루고, 절대적 보편성과 개별적 형태의 기록이 통합되는 과정이 관객들에 의해 한 번 더 전복되어 담화의 형태로 맺어지는 것이다. 깊은 내면의 완성과 담화의 시작점은 곧 마지막과 시작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시공간의 교차지점이라 볼 수 있다.
[1] 샤를 보들레르(1821-1867)은 예술의 ‘현대성’을 일시적인 것(ephemeral), 순간적인 것(fugitive), 우연한 것(contingent)과 동시에 영원함(eternal), 불변(immutable)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며 이원론적 관점을 제시했다.
[2] 피정원 개인전 ‘합(合): CONFLUENCE’(서정아트, 2022)에서는 'Untitled: Black Path' 시리즈 대작을 설치해 부스 전체를 동굴 벽화 이미지로 구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