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아트 큐레이터 강명하
깊은 물 속으로 사라지거나 먼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것, 심층이나 무한과 맺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물의 운명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취하는 인간의 운명이다. 1)
―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거의 모든 회화 작품에는 어딘가 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의 《모비딕》에는 작품 도입부에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서양 연금술에 등장하는 물의 정령 운디네(Undine)는 물이라는 자연 요소가 가진 어둠만이 아니라 빛도 의식한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인어공주’의 원형이기도 한 운디네 신화는 배신으로 얼룩진 비극이지만 현실과 판타지가 뒤섞여 흥미로운 의미의 지층을 만든다. 프랑스 현대 사상가 바슐라르에게는 싹을 틔우고 샘을 솟아나게 하는 거역할 수 없는 탄생으로 상징되었다. 그에 의해 물이라는 질료는 과학철학과 문학 두 개의 축에서 물질적 영원과 원천으로 정의되고 시의 언어로서 아름답게 비약했다. 이처럼 물은 자연적 상징과 순수한 질료로 인류에게 신의 섭리이자 문학적 메타포로서 기능해 왔다. 어떤 물질보다 폭넓은 상징체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신화와 예술의 영역에서도 인류의 사고와 함께 유전되고 창조의 대상으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우리는 물의 서사 안에 머무르고 그곳에서 꿈을 꾼다.
이번 서정아트 기획전 《오다교: Undine》의 오다교 역시 물의 장소에 머물렀고, 작가의 회화 자체가 바다가 되었다. 바다에서 나고 자란 작가에게 물은 만물의 근원을 이루는 흥미롭고 신령스러운 기운이다. 오다교는 물에 인간의 그림자와 빛을 반영하고 그 반영이 암시하는 꿈을 이미지로 거듭나게 하였다. 그렇게 작가의 지속적인 인위(人爲)로 탄생한 무위(無爲)의 바다는 자신을 온전히 마주하는 하나의 통로가 된다. 그의 경험과 상상력을 빌어 탄생한 물의 감각, 물을 다루는 원칙은 어떤 회화적 메시지로 기록되었는지 전시를 통해 마주해 보고자 한다.
오다교의 바다는 명상과 결합되어 있다. 고요하고 온화한 날 저녁 바다의 표면을 연상하게 하는 still (112X194cm)은 작가의 영혼이 썰물과 함께 왔던 곳으로 돌아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듯 넓게 퍼진다. 밀물과 썰물의 드나듦처럼 한 층씩 쌓이고 닦여나간 표면의 부드러운 납빛은 무채색 모래 향기가 배어있다.
“ 흙은 물처럼 그 자체로는 특별한 모양이 없으나 어떤 모양을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 다양한 형상들을 만들어 낸다. 형태가 없으면서 형태가 되는 흙의 성질 때문이다. 아교를 녹인 물에 흙과 안료를 섞으면 진흙 상태가 된다. 이것을 장지에 부착하는 식으로 얹히기도 하며, 일반적으로 종이에 칠하듯 붓으로 일필휘지로 흙과 안료가 종이 위를 지나가며 스며들게 하기도 한다. 화면에서 붓을 든 나의 행위의 순간들이 점착되어 건조과정을 통해 마치 화석과도 같이 굳어 항구성을 갖게 된다." 2)
무색이면서도 모든 색깔이 함축된 잿빛은 바다에 내재한 영적이고 의미심장한 본질을 보여준다. 특히 광활한 바다의 위엄을 담아내고자 가로길이 총 6m의 바탕에 시도한 작업은 휴먼 스케일을 뛰어넘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야단법석 세상의 한쪽 뒤편에서 자연과 인간의 잠재력과 고결한 처지를 점진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반면 on the sea (53X45.5cm)는 천진한 힘을 품은 물결이 우아하게 굽이친다. 반짝이는 푸른 모래 물결의 유연한 움직임은 단단하고 투명하다. 매끈하고 동그란 수정 같은 알갱이와 점보다 잘고 보드라운 흙가루를 아교와 배합하여 촉촉하게 얹어낸다. 작가는 작품 사이즈에 따라 마포, 캔버스, 린넨, 장지 등을 변주하며 사용하는데, 특히 on the sea 시리즈는 흙, 모래가 얇게 올라가 스며들면서 자연스레 번지는 느낌을 위해 장지를 선택하였다. 해변가의 모래가 바람과 햇빛에 자연 건조하듯 장지 위의 모래흙은 겹겹의 에너지를 품고 너른 물결이 된다. 그리하여 해수면의 잔잔한 우아함과 벨벳 같은 반짝거림은 꿈결처럼 평온하게 표현된다.
오다교는 바다 시리즈를 통해 존재 차원에서의 완전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귀향을 향한 바람을 표현한다. 완전한 세계에 대한 갈망을 일반인보다 짙게 느끼는 듯한 작가에게 바다는 영혼의 조용한 힘이자 강인한 존재 방식이다. 작가의 마음을 이끈 영원한 생명 원칙으로서의 바다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의 논리와 운율로 펼쳐진 장지 위의 바다는 우리에게 그 너머 어딘가 근원을 바라보게끔 하는 성취를 이뤄낸다. 인류의 기묘하고도 복잡한 사태는 바다의 은은하지만 포괄적인 규모 앞에선 장난이나 농담처럼 여겨진다.
1)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김병욱 역, 이학사, 2020, p.27.
2) 오다교, 「흙을 이용한 빛의 표현 : 나의 작품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 동양화과, 석사학위 논문, 2021, p.46-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