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 K 수석 큐레이터 이장욱
조지아
신들의 고향이자 와인의 고향인 조지아. 캅카스(코카서스)산맥 남쪽에 있는 조지아는 그리스 신화와 성경의 배경이 된 곳이다. 인간에게 불을 건넨 프로메테우스가 벌을 받던 산(카즈베기산)이 있는 곳이며, 이아손이 황금 양털을 구하러 온 곳이기도 하다. 천연가스가 풍부한 주변국(아제르바이잔, 이란)을 중심으로 융성한 조로아스터교의 영향권에 있기도 했지만, 로마보다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인 곳이다. 서아시아의 끝이며 동유럽의 시작점인 동시에 북쪽의 기독교 문화와 남쪽의 이슬람문화가 교차하고 좌우로는 흑해와 카스피해가 있는 지리적 요충지이다. 이 문명의 교차로를 얻기 위해 열강이 주도권 다툼을 했기에 이 땅은 페르시아 문화권에 속하기도 했으며, 이슬람 문명과 몽골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기도 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당 서기장이자 대원수였던 스탈린의 고향인 동시에, 그루지야(Gruzija)라는 러시아식 국가명을 버리고 조지아(Georgia)를 국가명으로 사용하고 있는 나라. 잦은 외부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지만 오랜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언어와 민속을 지켜온 조지아는 세계 역사와 문명의 압축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조지아에서 나고 자란 작가 루수단 히자니쉬빌리(Rusudan Khizanishvili)는 성스러운 종교의 진리와 속세의 현실성을 넘나드는 독특한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부드러운 것의 힘
루수단의 작품에는 많은 여성이 등장한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여신들을 비롯해 조지아의 황금시대(Golden Age)를 이루었던 타마르(Thamar) 여왕 등이 그녀의 여성주의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대부분 야생의 옷을 입고 신화나 꿈속에 나올법한 캐릭터처럼 등장한다. <The Shell>은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 연상되는 작품이다. 가리비는 그림 속 여성의 안식처인 동시에 자신을 보호하는 갑옷이며 생명 탄생의 근원인 자궁을 떠올리게 한다. <Pheasant Farm>에서는 나신의 여성이 수꿩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뒤편에는 꽃봉오리에서 막 피어난 듯한 결실들이 얼굴을 내민다. 여왕이 즉위할 당시 가장 강력한 위세를 떨쳤던 조지아의 황금시대와 모계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The Armor>에서는 달빛 아래 연약한 속살을 보이는 여성에게 자연을 닮은 옷을 입히는 여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은 빠른 적응과 교감이다. 부드러움은 강한 것을 넘어설 때가 많다. 부드러운 물은 바위를 깎고, 유연한 갈대는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다. 체코에서 일어난 벨벳혁명은 비폭력 저항으로 권력을 교체했기에 부드러운 벨벳의 이름을 붙였다. 새로운 환경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오랜 침략을 받았던 조지아 사람들을 지속 가능하게 했던 능력이다. 오늘날 조지아가 훌륭한 관광지로서 인기를 끌 수 있는 비결은 천혜의 자연과 더불어 이방인에게 쉽게 집의 문을 열어주고,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와인을 나누는 그들의 교감 능력이 큰 몫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이처럼 조지아는 올지도 모르는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감수하고 사랑하는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실천하는 곳이다. 주어진 환경에 대한 교감이 만든 갑옷은 <The Ring Armor and the Star>와 <The Touch>에서도 잘 드러난다.
신화, 별, 잡종
우리의 일상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균형이다. 일과 휴식, 개인과 사회, 이상과 현실 등 모든 일에는 균형이 필요하다. <Balancing>에서는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하는데,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세 여신 모이라이(Moirai)나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생명의 샘을 지키는 세 여신 노른(Norn)이 연상된다. 3은 모두라는 말이 붙을 수 있는 최초의 숫자이며 통합을 뜻한다. 성부-성자-성령, 하늘-인간-땅, 탄생-삶-죽음, 영-혼-육체 등을 나타낸다. 세 여신 이미지는 루수단의 작품에 많이 등장한다. <Shining>에서 운명의 실타래처럼 서로의 머리가 연결된 두 사람과 목걸이를 들고 있는 여성의 모습에서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운명을 예지하는 것 같다. <Tiko aka Russian Doll>에는 그림 안에 그림이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는 모계로 전승되는 역사가 엿보인다. 그림 속 그림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여인으로부터 목걸이를 들고 앉아있는 여인에게 이어진 유산이 그림 밖 여성으로 이어지는 모습으로 보인다. 이 유산은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루수단의 그림에서는 별이 많이 등장한다. 하늘의 별을 그린 것도 있고, 별 문양이나 패턴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늘의 별 중 여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금성과 달이 있다. 남녀를 구분하는 기호로 쓰이는 ♀♂ 이 표식은 화성(♂)과 금성(♀)을 구분하는 천문학의 행성 기호였다. 금성은 달 다음으로 가장 빛나는 별이고, 그 아름다운 자태로 비너스(아프로디테)에 비유된다. 그리고 천궁에서는 처녀자리와 더불어 달의 지배를 받는 게자리가 여성성을 대표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게자리는 어머니 신인 헤라가 헤라클레스와 맞서기 위해 보낸 존재이다. 이들 모두는 남성 중심의 문화 속에서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The Necklace>에서는 게를 든 여성이 등장하는데 이는 마치 게 문양의 목걸이나 방패처럼도 보인다. <Observatory>에서는 원숭이 몸을 한 여성이 두 인물을 감싸고 있다. 천문대 혹은 신전처럼 보이는 곳의 양쪽 위에는 달과 태양이 그려져 있다. 공간의 바닥은 구멍이 나 있어서 달 표면의 분화구처럼도 보이고, 조지아 황금시대에 타마르 여왕이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설된 바르지아 동굴 도시처럼도 보인다. 이집트문명에서 달의 신 토트(Moon God Thoth)는 개코원숭이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Black Horse Water>에서는 거대한 산맥을 등지고 달처럼 보이는 거울 앞에 반인반수가 있다. 발아래는 검은 강이 흐르고 하늘엔 별이 가득하다. 강이나 골짜기 등에 머물며 자연을 수호하는 님프가 연상되는 이 그림은 여성스러운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남성성을 상징하는 수사슴 뿔이 있기에 달의 여신이자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도 떠오른다. 이 간성의 존재는 거울 속에 비치는 과거를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자기 모습을 다짐이라도 하듯이 아르테미스가 들고 다녔던 활 대신 간절한 소망의 장미 덩굴을 감싸 안고 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산은 캅카스 지역의 산지로 보이는데, 그림 <A Walker>에서도 비슷한 지형의 산을 볼 수 있다. 작품의 제목에서 ‘물 위를 걷는 자’라는 종교적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고, 캅카스 너머의 거인이 산을 넘어와 강제로 묶은 연대의 역사, 소비에트 연맹에 속했던 조지아의 역사(부동항을 얻기위한 러시아의 남하정책)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경계, 너머
루수단은 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손에 자랐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후 조지아는 독립과 함께 자유시장경제를 채택했지만, 정치-경제적인 어려움은 지속되었다. 오랜 전쟁의 여파로 가부장적 문화가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는 곳에서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꿈꿔온 화가의 길을 꿋꿋이 걸어왔다. 한 편으론 남성 중심 문화에 젖어 자신을 한계 짓지 않고 주도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은 이런 환경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루수단의 작품에는 여러 나라의 신화나 역사 철학, 그리고 문학작품 등에서 영향을 받은 다양한 내러티브가 전개된다. 그녀의 그림 속에서 인간과 동물 그리고 식물은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며 공존한다. 원시시대의 벽화와 그리스의 신화를 비롯한 고대 서사시, 조지아와 이민족들의 민속, 그리고 기독교 도상학 등이 버무려진 그녀의 그림은 자신만의 사진적 프레임(클로즈업, 크로핑)을 통해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그녀가 영향을 받은 거장들의 그림과 문학작품들은 동화와 역사,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그림 속에서 그녀만의 활기차고 차별화된 마술적 사실주의를 완성하고 있다. 생명, 보살핌, 치유로 상징되는 모든 여신의 딸인 그녀는 캅카스와 흑해를 너머 벨벳 갑옷을 두른 채 이곳 서울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