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윤정 (서정아트 선임 큐레이터)
SEOJUNG ART Senior Curator Yunjung Lee
깊은 역사와 문화를 공유한 지식인들이 모여 자유롭게 예술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 전위적인 활동을 이어갔던 조지아의 모습은 과거 소련의 침공이 있던 20세기를 전후로 완전히 달라졌다. 유럽과 아시아의 지정학적 요충지인 조지아는 정치와 국제 관계가 긴밀히 얽혀 타지역과 교류함에 있어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으며, 그럴수록 국가와 나 자신의 정체성을 견고히 다지는 일은 예술가들에게 남겨진 몫이었다. 루수단 히자니쉬빌리(Rusudan Khizanishvili, 1979-)의 작품세계도 역시 그러한 문화권 안에서 살아온 여성으로서의 자신, 모성에 대한 성찰, 조지아만이 지닌 역사적 특이점에서 비롯된 시각적 탐구로 구분된다.
루수단의 작업 곳곳에는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 고유의 색채가 배어있다. 다소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흑해가 유입되는 지리적 특성, 산맥의 절경을 담은 도상을 찾아볼 수 있으며, 대자연을 향한 경외감이 어렴풋이 드러나 그곳이 오래된 신화의 시작점이었음을 알린다. 이를테면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형벌로 결박당했던 코카서스의 카즈베기산(Mount Kazbegi), 하늘에 작은 신들을 만들어 살게 했다는 창조의 신에 대한 이야기는 그곳에 방문한 사람들에게 태초의 세상과 신의 존재를 다시금 상기하게 하는데, ‘따뜻하다’는 어원만큼이나 구시가지의 아름다움을 보존한 채 과거와 현재를 잇는 트빌리시는 그 안에 속한 예술가에게는 특히 문화적 영향을 주기에 충분해 보인다.
루수단은 ‘여성’을 모티프로 작업의 주제를 이어가며 ‘보호’라는 개념에 천착한다. 작업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 중심에는 주로 여성이 있으며, 잠을 자거나 몸을 기대어 머리를 늘어뜨린 포즈를 취하고 때로는 특정 행위를 통해 어딘가에 골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Balancing>(2022)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묘사된다. 머리 위에 구 형태의 사물을 올려 균형을 잡고 제의적(祭儀的) 동작을 실현하는 인물들을 화면 중앙에 제시함으로써 일종의 상징성을 담아 특정 제스처를 의식에 가깝게 표현한다. 신비주의에 대한 작가의 관심도 함께 표출되는 이 영적인 효과는 극적인 패턴과 색감에서 오는 비현실적 요소와 만났을 때 더욱 극대화되는데, 두 여성의 정면 모습이 담긴 초상 <Shining>(2023)은 후광을 삽입해 초자연적 에너지가 발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여기서 하늘 위로 뻗은 두 손과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 처리는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연상하게 해 러시아에 의해 잃었던 조지아 영토에 대한 애도, 혼란의 시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앞으로 겪을 수 있는 위험에 대비하고자 하는 희망적 메시지가 함축된 결과로 이어진다.
작가는 여성을 비유하는 모티프인 자궁, 침묵, 비밀, 신비, 환희 등의 비유를 시각적 코드로 구현해 여성으로서의 작가 자신을 분석하고 내포된 의미를 확장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 과정에서 ‘수면’은 각종 도상 중에서도 신화적 의미로 연결할 수 있는 모티프다. 달콤한 꿈에 빠진 순간을 포착한 <Diving>(2023)과 <The Shell>(2023)에서 눈을 감고 몸을 웅크린 여인은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 놓인 수면 상태를 보여줌으로써 꿈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담아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화려한 패턴이 점철된 배경과 길게 늘어뜨린 붉은 머리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드레이퍼리(Drapery)처럼 몸을 감싸 장식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보는 이로 하여금 의식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우리에게 알려진 그리스 신화 속 일화가 일부 조지아의 땅에서 탄생했기에 특정 모티프가 지닌 의미는 신화에서 그 어원을 찾아볼 수 있으며 상징적 의미 또한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신화에서 잠의 신 '히프노스(Hypnos)'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Thanatos)의 쌍둥이 동생으로서 잠은 휴식과 안식을 주는 동시에 죽음과도 닮아있다고 믿어져 왔다. 실제로 현대 의학이 발달하기 이전 사람들은 수면의 영역을 최면술, 죽음과 관련지어 연구했고 그로 인해 생긴 공포감은 각종 문학과 미술에서 다루는 소재로 이어졌다. 유럽권 문학에서 수면 도상이 지금까지도 신비롭고 두려운, 알 수 없는 세계로 묘사되는 이유다.
여성에서 어머니, 모성에서 대자연으로 이어지는 도상학적 의미는 <Observatory>(2023)에서 은유적 표현으로 빗대어 나타난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만물에서 생명을 잉태하고 보호하듯 무릎 위에 생명체를 품어 소중히 다루는 모습은 흡사 어머니의 모성을 떠오르게 한다. 여기서 양옆에 뜬 해와 달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표식이며 비현실적으로 굽어진 땅과 그 위에 뚫린 여러 개의 분화구는 이곳이 현실의 공간이 아님을 암시한다. 작품 속 두 사람을 품은 거대한 존재는 원숭이 가면을 썼지만 코르셋을 착용한 모습에서 여성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단단한 가죽과 검은 털로 뒤덮인 상체와 달리 연약한 분홍색 속살을 드러낸 하반신은 이 기이한 생명체의 존재를 밝히는 데에 열쇠를 쥐여준다. 작가가 인식한 여성은 부드럽고 유연한 살갗을 가진 존재이기 전에 강인한 힘을 내포하고 있는 자주적인 생명체다.
보호의 역할을 수행하는 도상은 몸을 감싸는 또 다른 소재로부터도 나타나는데, <Pheasant Farm>(2023) 속 단단한 부리를 가진 여러 마리의 새는 여성의 신체를 감싸며 지키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듯 보인다. 루수단은 여성의 신체적 특성, 연약한 속성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단단한 갑옷이나 몸을 감싸는 휘장과 같은 도상을 주로 차용한다. 방어의 매커니즘으로서 작용하는 갑옷은 위험에 노출된 신체를 보호하는 역할과 동시에 개개인의 존재에 대한 각인과 취약한 환경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의지까지도 표상하는 도구다. 현실적 기능에서 벗어나 각 도상에 부여한 상징적 의미에 다가가려는 작업 방식은 이미지에 투영된 비가시적 힘을 믿는 것처럼 보인다. 강렬한 원색적 색감, 직선적 형태, 단단한 질감 등의 모든 요소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혼란스러운 내면에 힘을 실어주는 부적과도 같은 것이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개인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역사를 뒤로한 채 작동하는 방어 기제는 견고한 물질의 속성보다 오히려 온화하고 부드러운 대상으로 치환됨으로써 역설의 효과에 기댄다.
피부를 보호하는 수단과 물질의 다양성은 곧 촉각과 청각, 시각 등의 공감각적 요소로 확장되어 치유의 개념과 연결된다. <The Sounds>(2023)와 <The Touch>(2023)는 촉각과 청각을 시각화한 것으로, 상처를 어루만지는 손길을 통해 치유 받은 자신을 드러낸다. 이는 인간의 손이 신체에서 가장 친밀하고 취약한 부분임을 내포한다. 도상학적으로 ‘진실성’, ‘기적’을 상징하는 손은 예수의 12사도 중 한 사람인 사도 성 토마스(Apostle Saint Thomas)의 손이 지닌 의미와 상통한다. 예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만지고서야 부활에 대한 의심을 멈췄던 서사가 전승됨으로써 이 제스처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의심을 초월한 영적인 실재를 가리키는 소재로 통했다. 손을 뻗어 도달한 손끝의 감각은 작업 속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신체의 표면을 관통해 내면 깊숙한 곳으로 가는 시작에 비견할 수 있다. 오감으로 지각하는 현실 세계와 달리, 상상 속에서 구현된 세계는 시간에 의해 변형되거나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이 감각하는 현실 너머 존재하는 이데아(idea)에 대한 시각화이기도 하다. 실존하는 인물이라도 가상의 세계에 배치된 이후 그 존재는 단지 착시에 불과한 것처럼, 화려한 색으로 점철된 캔버스는 모든 사물의 진실재로서, 인식 최고의 초월 단계로 통하는 방향성을 제시함과 동시에 변화하고 불완전한 세계 이면에 존재하는 영원불변한 속성을 드러낸다.
장식적 요소를 거두어 낸 후 마주한 내면, 감각하는 사유에 골몰하는 루수단의 작업은 결국 영속성을 기원하는 각종 도상과 엮여 영적인 신비주의로 나아간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이기도 한 여성의 삶, 어머니로서의 역할과 임무에 충실했던 지난 삶을 돌아보는 회고적 성격이기도 하다. 이성으로 규명할 수 없는 현상을 자연적 힘을 빌려 드러내고, 파악하는 일련의 수행적 사고는 오컬티즘적 성격을 띠는 작가의 일관된 태도이자 심연을 들여다보는 창구가 될 것이다.